다극화논평

다극화의 진보성(1): 민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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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기의 다극화는 역사상 몇 차례 출현했던 과거의 다극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다극화는 먼저 그 추진 주체 면에서 크게 다르다. 과거의 다극화가 지역적 혹은 세계적 패권을 다투는 소수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시기 다극화는 주로 개발도상국에 속한 신흥 국가들이 대거 부상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장 큰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국제질서의 다극화는 과거 이미 몇 차례 존재한 적이 있다. 가깝게는 19세기 후반~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존재했던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의 5강 체제가 그것이며, 또 조금 멀리는 나폴레옹전쟁 직후 영국‧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의 5강 체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다극 체제는 모두 소수 강대국이 지역 내지는 세계적 차원에서 ‘세력균형’을 통해 기존의 ‘세력 분할’을 지키기 위해서 형성한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국제관계에 있어 볼 때 이는 소수집단의 독점적 특권의 성립에 기여하는 의미를 지녔다.​

당대의 다극화, 즉 냉전 종식과 함께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지금의 다극화는 그 성격에 있어 완전히 다르다. 냉전 시기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그동안 뒷전에 밀려나 있던 ‘경제문제’가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 각국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그간 가려져 왔던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 역시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부상하였다. 이리하여 ‘남북문제’는 이제 과거 냉전 시기 동서 간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체하는 국제사회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

현재의 다극화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추진되는 것임을 우리는 우선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개발도상국 진영에 속한 신흥공업국들이 속속 부상함으로써, 북부 국가(서구 선진자본주의 진영)의 세계 정치·경제 영역에서의 독점체제를 뒤흔들면서 전반적으로 남북 간 힘의 균형이 재조정되는 양상이다.​

개발도상국 진영은 현재 지구상의 광범위한 국가군과 지역을 포괄한다. 소련과 동구권 변동 전에 전 세계에는 약 191개 국가와 지역이 있었는데, 그중 개발도상국은 약 163개 정도였다.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에 따라 소위 ‘전환국가’인 동구권 국가 대부분은 기존의 제2세계에서 제3세계(즉 개발도상국)로 하향 이동하였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은 180개 정도로 증가하였으며, 인구와 토지 면적에 있어서는 각기 4억 명과 2,500만 제곱킬로미터가 더 증가하게 되었다.​

이렇듯 개발도상국은 그 국가 수와 인구 및 토지 면적 등에 있어 모두 절대적인 비중을 갖고 있음에도, 그간 국제사회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지위와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당해 왔다. 이 때문에 소수의 서구 선진국이 주도하고 그들에게만 유리한 국제질서가 아니라, 이들 광범위한 다수 국가가 적극 참여하고 또 이들의 이해가 반영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렇듯 다수 국가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다극화는 민주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 브릭스가 G7(집단서방)에 맞서 다극화를 추진하는 선봉에 서 있다. 여기서 브릭스와 전체 개발도상국 진영과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세계 정치와 경제에 있어 브릭스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브릭스의 GDP 비중은 2023년 회원국 확대 이후 구매력 기준으로 대략 전세계 GDP총량의 약 36%를 차지하며, 또 이들의 세계 경제 성장에 대한 공헌도는 30%를 넘어선다. 여기에 전 세계 영토 면적의 31%, 세계 총인구의 45%인 점까지를 감안하면 브릭스가 오늘날 국제무대에 있어 상당한 대표성과 영향력을 가진 하나의 ‘극’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기존 브릭스 5개국 중 남아공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머지 4개국(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은 각기 단독적으로도 다극화 체제의 한 ‘극’을 형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개별국가로서가 아닌 ‘브릭스’라는 집단적 측면을 강조하는 까닭은, 이들이 ’브릭스‘라는 형식을 빌려 앞으로 구축될 신 국제질서 건설을 위한 보조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동전선의 형성은 브릭스 내부 성원 간의 동질성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모두 서구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주로 원료와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로서 역할 하며 불리한 위치에 처해왔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IMF-세계은행으로 대변되는 현 국제통화체계 속에서 주기적으로 외환위기와 채무 위기 등의 금융 불안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평소 충분한 외환 비축을 쌓기 위해 수출주도형 경제를 유지해야만 하였고, 이를 위해 자국의 환경파괴와 자원 낭비를 대가로 선진국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이처럼 과거 냉전체제 하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낡은 국제질서와 국제 분업으로부터 불공정한 대우와 억압을 받고 있기에, 브릭스는 자신들이 앞으로 지속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같은 불리한 체제를 반드시 개혁해야만 한다는 데 공감한다. 브릭스 국가들은 이처럼 개발도상국 진영에 속한 대부분 국가의 보편적인 상황을 공유하면서, 그들 스스로 이를 잘 의식하고 있기에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개발도상국으로 규정한다. 이로부터 그들이 추구하는 신 국제질서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과 패권을 부정하고 민주와 공정, 호혜 원칙을 표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 간에 상호 대립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인도 간의 국경 문제 및 지역 정치를 둘러싼 상호견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브릭스 내부의 공통이익에 비하면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국제통화체제 개혁을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브릭스’의 역사적 의미는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미국 패권이 무너지고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국제질서의 새로운 변화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브릭스 내지는 개발도상국 상호 간의 그 어떤 지역적 대립과 갈등보다도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물론 어느 측면이 더욱 이들 상호 간의 관계를 주도할 것인가는 상당 부분 앞으로의 투쟁(상호 간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들 내부를 분열시키려는 현대제국주의 세력과의)과 주체의 노력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지만, 이 또한 커다란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글: 김정호 (울산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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