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화논평

다극화의 진보성(2) ㅡ 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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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국 진영을 대표하는 브릭스는 ‘공정한’ 신 국제질서 수립을 요구한다. 여기서 이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의 핵심 내용은 ‘역량에 비례’한 권한의 부여이다. 신흥개도국이 그간의 발전을 통해 국제 역량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서방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과거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공정성’에 대한 지향은 정치적으로는 안보리 이사회 개혁을 통한 유엔의 역할 강화 요구로, 경제적으로는 IMF와 같은 국제통화기구 개혁에 대한 요구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브릭스 주요 회의나 정상 간 공동성명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표출된다. 예컨대 지난해 브릭스 15차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브릭스 지도자들은 “우리는 유엔을 보다 민주적이고, 대표적이며,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며, 안보리 회원국에서 개발도상국의 대표성을 높여 현재 세계적인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안보리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혁을 지지한다”라고 천명했다. 또 브릭스 그룹 내부의 금융결제 방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BRICS와 그 무역상대국 간의 국제무역과 금융 거래에서 현지 통화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재의 달러패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여기서 국제통화제도의 개혁은 특별히 중요하다. 단극체제, 즉 단일패권적 현대제국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이 달러패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권 화폐’에 불과한 달러가 세계화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하며, 기존 국제질서가 지닌 ‘불공정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세계화폐인 주권 화폐는 사실상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하면서도, 그 발권 국가인 미국에게 세계 자원을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브릭스는 그동안 국제질서 개혁의 초점을 국제통화체제 개혁에 맞추어 왔다.​

국제사회에서 ‘신용화폐화 한 세계화폐’ 즉 금 태환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화폐의 발권력을 어느 특정 국가가 독점하게 되면, 그 나라는 전 지구적 자원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 나라는 이 같은 권력을 기초로 먼저 자국 내에서 지속적인 복지정책을 수행하는데 가장 고질적인 장애인 ‘복지기금’ 부족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로부터 국내의 사회 정치적 안정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 구축에 필수적인 과학기술 발전에 소요 되는 막대한 자금을 별반 힘 안 들이고도 동원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슈퍼 패권국가 성립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들이다.​

이 같은 세계화폐에 기초한 현대제국주의는 제국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이자 그 최종 형태라 할 수 있다. 슈퍼 패권국가인 미국에 있어 달러패권의 중요성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주권국가가 형성된 이래, 그 어떤 국가도 세계 다른 나라를 희생하는 대가로 장기간 이득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71년 이래(닉슨 대통령이 달러 불태환을 선언한 해-주)로 지구상 유일하게 슈퍼대국인 미국은 날로 형성되는 자신의 달러패권에 기대어, 상호의존도가 깊어지는 국제사회에서 세계경제로 하여금 미국경제에 복종케 만들었으며, 세계 각국이 자신에게 변형된 형태의 ‘조공’을 바치는 제국(帝國)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된 세계에서, 군사적으로 야심 있는 국가들은 하나 같이 채무국이면서 높은 세율과 고비용의 경제체제로 변모하여, 최후에는 스스로 유지하기 힘들게 되어 결국 전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프랑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전후한 독일 등이 그러하였으며, 모두 예외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상 유일한 슈퍼대국인 미국만이 이미 가볍게 4차례의 국부적 전쟁을 치룬 후, 다시 한 차례 이란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된 세계에서 각국은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수출을 시도한다. 이로부터 진정한 재화인 황금 혹은 기타 경화(硬貨)를 획득해 자국 생산을 확대하려 한다. 그 어떤 나라도 장기간 무역적자를 유지하길 원하지 않고, 또 그렇게 할 능력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슈퍼대국인 미국만이 수십 년을 하루같이 수입이 수출보다 큰 상황(무역적자)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무역은 미국이 지폐 달러를 발행하고, 다른 나라들은 이 달러로 구매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놀이(게임)’로 변모되었다. 이리하여 지구상 최대의 무역적자 국가인 미국은 경제의 고도한 번영과 지구적 패권을 누리는 반면, 지구상의 수많은 무역 흑자국은 ‘수출 조공국가’로 전락하여 국내의 빈곤과 자본 부족 사태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된 세계에서 채무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세계 권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자국정책과 중앙은행이 금융정책을 제정할 수 있는 자주권마저 상실한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상 최대의 채무국인 미국은 여전히 지구상 유일한 슈퍼대국이다. 채권국들은 오히려 날로 자국의 국내 정책과 중앙은행의 금융정책을 제정할 수 있는 자주권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처럼 달러패권은 이미 완전하고 철저하게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미국 달러패권과 경제위기(美元霸权与经济危机)》,pp522-523.

직접적 영토점령이 특징인 구제국주의와는 달리 현대제국주의는 ‘규범(규칙)에 입각한 통치’를 특징으로 한다. 지금 그 규범체계의 핵심은 ‘달러패권’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현 국제통화질서이다. 따라서 이 규범(규칙)을 바꾸면 현대제국주의는 곧 해체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요구하고 있는 집단이 다름 아닌 브릭스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주권 화폐(일국 화폐)를 통해서 달러패권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국제화폐의 채택을 통해 왜곡된 지금의 국제통화체계를 바로잡으려 한다. 이 때문에 브릭스는 패권적 규범을 다시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며, 현 세계화폐에 기초한 현대제국주의의 종식과 진정한 다자간 체제의 수립을 바란다.​

이것이 다극화가 본질적으로 반제국주의 성격을 갖는 이유이다. 다극화세력이 요구하는 ‘공정성’ 규범은 가장 직접적으로 달러패권의 부정을 겨냥하며, 그것은 곧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이자, 가장 보편적 의미에서 ‘독점’ 일반에 대한 부정이다.

글: 김정호 (울산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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