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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회랑: 러시아와 이란을 겨냥한 ‘잔게주르’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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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9일, 아제르바이잔의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 아르메니아의 니콜 파시냔 총리,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3자 합의는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종결시켰다. 합의문의 마지막 조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지역 내 모든 경제 및 교통 연결을 차단 해제한다.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아제르바이잔 서부 지역과 나히체반 자치공화국 간의 교통 연결 안전을 보장하여, 양방향으로 시민, 차량, 화물의 자유로운 이동을 확보한다. 교통 연결에 대한 통제는 러시아 연방보안국 국경수비대가 수행한다.”

이 조항 어디에도 특정 경로나 회랑 명칭은 언급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기존 입장을 감안하면, 러시아는 1992년 이후 폐쇄된 캅카스 철도의 재개통—나히체반 구간은 예레반을 거쳤고, 아르메니아 영토를 통한 도로 노선도 병행—을 상정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후 전개는 예레반과 바쿠 어느 쪽도 이 방식을 지지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양측은 조용히 또 다른 방안을 선호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아르메니아의 통제를 우회하며 이란 국경을 따라 붙는 약 40km 구간의 ‘잔게주르 회랑’이다.

세 가지 통로, 하나의 정치적 결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잔게주르만이 본토 아제르바이잔을 나히체반 자치 영토와 연결할 유일한 루트는 아니다. 둘째, 더 합리적인 대안은 예레반이나 카라바흐를 직접 관통하는 도로 노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루트들이 추진된다면, 이는 단순히 이란 국경을 스치는 좁은 남부 회랑보다 훨씬 의미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 지속 가능한 경제 통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대안은 공적 논의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셋째, 어쩌면 가장 기능적인 해법은 이미 존재한다. 휴면 상태인 캅카스 철도다. 진정한 지역 회랑, 즉 양국 모두에 이익을 주고 더 넓은 동서 무역 흐름에 통합될 수 있는 회랑을 원한다면, 철도 복원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다. 이 시스템은 이미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화물 수송에 더 지속 가능하고 장기적 연결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정치적 난관이 있다. 아르메니아 철도는 2008년부터 30년 계약으로 러시아 철도(RZD)가 보유한 ‘남캅카스 철도(YuKJD)’가 운영 중이다. 이 루트를 복원하면 러시아의 인프라와 영향력이 강화되는데, 이는 예레반과 바쿠가 지금 모두 피하려는 시나리오다.

러시아 배제 캠페인

최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국의 정치적 흐름을 보면, 두 정상의 공통 목표가 분명하다. 알리예프 정부는 의도적으로 모스크바와의 긴장을 외교적 대치로 전환하는 도발 전략을 취해왔다. 그의 더 큰 목표는 분명하다. 러시아를 지역 방정식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 2018년 서방 주도 ‘색깔 혁명’을 통해 집권한 파시냔은 이제 모스크바 배제를 숨기지도 않는다. 그의 통치 프로젝트 전체가 러시아 주변화를 축으로 구축되어 있다. 지난 전쟁에서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결단코 지지하지 않은 점은 양국 모두의 지역적 입지를 약화시키며 서방의 침투를 열어주었다.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 이후, 파시냔 행정부는 쿠데타 의혹에 휩싸였고, 최고 장군들을 해임했으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와의 관계를 동결하고 EU 개입을 요청했다—이 모두는 우연이 아니었다. 명백한 친서방 전환의 신호다. 이 과정에서 파시냔은 체계적으로 국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최근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겨냥했다. 그는 스스로를 ‘신성한 국가적 사명’의 지도자라 선언하며 성직자들을 ‘이단적, 반국가적, 반민족적’이라 규정하고, 아르메니아 대주교 아카파얀을 “예수 그리스도 및 그 가르침과의 완전한 단절 상태”라 비난했다. 파시냔은 교회를 직접 ‘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정치적 숙청은 결국 아르메니아 전력망(Armenia Electric Networks)을 거점으로 한 친러시아 카라페티얀 그룹의 해체로 귀결됐다. 이들의 배전망 지배권은 박탈돼 국유화되었고, 국유화가 처음으로 러시아 영향 축출의 수단이 된 셈이다.

이란의 계산과 아라스 대안

그러나 또 다른 루트가 있다. 바로 107km 길이의 아라스 회랑, 이 중 60km는 이란 영토를 지난다. 2023년 9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아르메니아가 잔게주르를 막는다면 아라스 회랑을 가동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한 달 뒤 아제르바이잔은 아그벤드 인근 아라스 강 위에 다리 건설을 시작했다. 이란 타스님 통신에 따르면 2024년 1월까지 도로 공사의 15%가 완료되었고, 다리는 완공 직전에 있었다. 철도 건설 계획도 이란의 승인 아래 진행 중이다. 이란의 입장은 분명하다. 2023년 중반, 이란은 아르메니아의 주권을 우회하는 어떤 회랑도 전면 거부했다. 이는 단순한 피해망상이 아니라, 아르메니아가 남부 국경을 잃으면 이란이 역사적 이웃이자 완충국가와 단절되기 때문이다. 2024년 여름, 이 회랑 문제는 대립으로 번졌다. 7월 30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파시냔을 만나 “잔게주르 회랑은 아르메니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밝혔다.

9월, 이란 의회 국가안보위원회는 잔게주르 회랑을 ‘이란의 핵심 레드라인’이라 선언하며, 국경 변경이나 지정학적 균형 변화를 시도할 경우 “강력하고 심각한 대응”을 경고했다. 2025년 6월 27일, 메흐디 소바니 주아르메니아 이란 대사는 다음과 같이 재확인했다. “‘잔게주르’라 불리는 이 회랑은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이익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것은 ‘레드라인’이다.” 국가안보회의 고문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도 “우리는 이 구상의 본질을 일찍 파악했고 실행을 차단했다”고 덧붙였다.

7월 21일, 에스마일 바가이 외교부 대변인은 다시 밝혔다.
“이런 회랑들의 설치는 주권과 영토 보전,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을 훼손해서는 안 되며, 지역의 지정학에 변화를 초래해서도 안 된다.”

러시아의 공백, 미국의 개입

모스크바는 여전히 2020년 11월 9일 및 2021년 1월 11일 합의를 근거로 ‘모든 지역 교통로 개방’을 주장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다. 2022년 이후, 러시아의 전략적 초점은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이동했고, 남캅카스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줄었다. 회랑 조항(제9조)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이로 인해 서방 정렬의 지역 질서가 조용히 짜여지고 있다. 러시아 평화유지군은 철수했고, 아르메니아를 통한 광역 교통 재개 계획은 붕괴됐다. 일부는 알리예프가 파시냔의 친서방 노선을 견제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두 국가는 오히려 서로의 반러 아젠다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25년 7월 4일, 마수드 페제쉬키안 이란 대통령이 한켄디에서 알리예프와 포옹하는 모습이 더욱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며칠 뒤, 알리예프와 파시냔은 UAE에서 회담을 갖고, 그들의 ‘잔게주르 구상’에 기반한 양자 평화협정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테헤란은 분명히 우려한다. 이 회랑 프로젝트가 미국 혹은 유럽 대리 세력이 이끄는 국제 컨소시엄에 넘어갈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란의 북쪽 전선에 적대 세력을 배치하고, 러시아를 축출하며, 이란을 완전히 우회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미국의 카우카스-레반트 담당 조정자 톰 배락(주앙카라 대사)이 직접 제안했다.
“잔게주르 회랑을 우리에게 100년간 임대하라.”

잔게주르: 경제적 구원의 환상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왜 잔게주르가 이 지역과 국제적 논의의 초점이 되었는가? 무엇이 변했는가? 2020년, 예레반과 바쿠 모두 ‘모든 교통 연결’ 재개에 합의했다. 그런데 2021년 4월, 알리예프가 갑자기 문제를 ‘잔게주르’로 틀며 이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이를 아르메니아의 ‘복수주의’ 때문이라 주장했지만, 한 달 뒤 실제 이유를 밝혔다. “아르메니아 철도가 러시아 통제 하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 고백은 게임의 본질을 드러냈다. 두 정부 모두의 목표는 러시아 겨냥이었으며, 표면적으로는 적대 관계인 양국이 암묵적 동맹으로 수렴한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부르자면, ‘실용적 외교’로 위장한 반러시아 연합이다. 알리예프는 단순한 파트너를 넘어 파시냔의 조력자다.

그렇다면 잔게주르는 과연 그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경제적 생명선’인가? 이 아이디어는 흔히 중국-유럽을 중앙아시아와 튀르키예를 거쳐 잇는 ‘중간 회랑’의 핵심 고리로 포장된다.
서류상으로는 무역과 통합을 매끄럽게 연결할 듯 보인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이 회랑은 이란과 러시아가 공동 관할하는 내해(內海) 카스피해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회랑 지지자들이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사실은, 러시아의 협조 없이는 이 지역을 통한 어떤 동서 교역 루트도 가동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잔게주르 프로젝트는 결코 중립적 인프라 계획이 아니라, 캅카스에서 모스크바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계산된 시도다.

바쿠가 대결 기조를 고수하고, 예레반이 서방의 우선순위에 묶여 있는 한, 잔게주르는 오늘날과 같은 상태에 머물 것이다. 즉, 평화와 번영의 수단이 아니라, 지역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심도를 허무는 지렛대이자, 이란의 지리적 레드라인을 건드리는 ‘유령 루트’로.

출처: https://thecradle.co/articles/the-phantom-corridor-why-zangezur-will-never-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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