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실리카(Pax Silica) 논쟁

54

[편집자주]

아르노 버트랑과 미국 헬버그 국무차관 사이에 오간 논쟁을 소개합니다.

2025년 12월 한국은 일본, 호주, 영국, 싱가포르, 이스라엘, 필리핀등과 함께 이 “팍스 실리카 선언Pax Silica Declaration” 의 가입국이 되었다. 기존의 군사동맹대신 경제안보, 기술공급망 동맹이다. 사실상 대중국 공급망 재편의 의미다. 중국의 희토류와 AI 공급망 영향력에 맞서 반중 실리콘기반 미국중심 국제질서의 다른 이름이라고 불러도 맞다. 대략 이 실리콘동맹은 반도체공급망 통제, AI, 첨단 제조장비, 희토류, 배터리,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등 미국중심 반중국 기술블록화가 그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뒤늦게 여기에 가입한 아래 필리핀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자뭇 다르다. 21세기판 미국의 AI 조계 혹은 그냥 미국조계American concession라는 말이다. 19세기처럼 그냥 미국이 필요로 하는 영토를 내놓으란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신식민주의가 아니다. 그냥 식민주의다. 그래서 필리핀조차 크게 반발하는 모양이다. 이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은 육해공 어디든 미국의 필요시 그 어디라도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경제’안보를 내세운다면 어찌 될까. 그냥 상상이었으면 좋겠다. 우선 아래 글과 지금 이시간 현재 진행중인 필리핀의 경험을 잘 따져 두자. 그리고 팍스 실리카의 한국적 변형에 대비하자.

팍스 실리카: 새로운 기술적 헤게모니인가?

아르노 버트랑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다. 미국이 필리핀의 일부를 말 그대로 재식민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소위 ‘팍스 실리카(Pax Silica)’ 구상 하에 이 일을 추진했는데, 이는 놀랍게도 국무부에서 미국의 경제 ‘외교’를 총괄하고 있는 팔란티어(Palantir) 출신의 제이콥 헬버그(Jacob Helberg)가 고안한 것이다.

팍스 실리카(Pax Silica)의 정의
‘팍스 실리카’ 구상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다른 국가들이 자국의 AI 기술 인프라를 미국 주도의 스택(stack)을 중심으로 재편하도록 약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벤더 종속(vendor lock-in)’이다.

“핵심 광물을 내놓고, 수출 통제를 워싱턴의 지침에 맞추며, 미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AI를 규제하는 대신, 오늘날 그 의미가 퇴색된 미국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전략적 목적: AI 경쟁에서 승리하기
본질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이것은 모두 중국에 관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국가들이 자국 기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겠다는 계약적 약속을 하게 함으로써 ‘AI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미국의 전략이다. 혁신을 통해 우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계약을 통해 국가들을 구속하려는 것이다.

화웨이 AI 칩 도입 거부권 행사
중국 자본의 데이터 센터 투자 차단
기술의 효율성보다 국기(플래그) 선택 문제
뉴클라크 시티: 미국 조계(租界)의 재현
그러나 이번 사례에서 미국은 훨씬 더 나아갔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60마일 떨어진 뉴클라크 시티(New Clark City)의 4,000에이커에 달하는 필리핀 영토를 떼어내어, 미국의 관습법(common law)에 의해 통치되고 외교적 면책 특권이 부여되는 구역으로 조성하려 시도했다. 이는 현대 세계 어디에서도 전례가 없는 배치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필리핀에 ‘미국 조계’를 요구한 것과 다름없다.

결론: 구조적 신식민주의
미국은 필리핀 영토를 미국 법으로 통치하겠다는 만화처럼 노골적인 식민지적 요구는 접었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아키텍처는 동일하다. 즉, 미국의 조건에 맞춰 미국의 공급망을 위해 봉사하고,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누구와도 거래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미국 헬버그 국무차관의 반론

제이콥 헬버그 미국 국무차관

귀하는 본인이 논의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팍스 실리카(Pax Silica)’의 핵심은 각기 다른 분야에 강점을 지닌 국가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며, 이는 공급망 안보를 통해 모든 참여국이 이득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기획이며, 정부 주도의 프로그램보다는 민간 기업 간의 협력 관계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외교적 면책특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언제나 시장과 투자자들이 5년에서 10년의 시간 지평(time horizon)에 걸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확실성과 예측 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갖춘 투자자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것입니다.

해당 관점은 언론에 의해 문맥에서 벗어나 본의와 정반대로 해석되었으며, 우리가 외교적 면책특권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사실이 아닙니다. 아울러, 해당 협정문은 온라인에 게시되어 있어 누구든 직접 확인하고 검토할 수 있습니다.

기술 패권
미국은 세계 최대의 기술 기업들이 소재한 국가이며, 이들의 공급망에 편입되는 것을 ‘굴종’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지한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글로벌 공급망
TSMC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업 중 하나이며, 미국과 전 세계 공급망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르노 버트랑의 재반론

아르노 버트랑

놀랍지도 않게 그의 답변은 거짓말투성이이며, 그중 일부는 정말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첫째: 외교적 면책특권
“우리는 외교적 면책특권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정말인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는 제이콥 헬버그(Jacob Helberg)라는 소식통을 인용해 이를 보도했는데, 내가 아는 한 그 인물은 바로 당신이다!

또한 BCDA(필리핀 기지전환개발청) 청장이 공개적으로 “그것은 [미국의] 요청이지만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필리핀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

둘째: TSMC와 미국의 공급망
당신은 미국의 공급망에 편입되는 것이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로 TSMC를 예로 들었다. 여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대만은 외교적 지위 문제로 인해 팍스 실리카(Pax Silica) 서명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당신네 대통령은 대만, 그중에서도 특히 TSMC가 미국의 반도체 제조 기술을 “훔쳤다”고 지속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참조: Yahoo Finance

나아가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과 국가 안보 위협을 지렛대 삼아 TSMC가 자사의 제조 공정 일부를 미국(특히 애리조나)으로 이전하도록 강요하는 다년간의 계획을 추진해 왔다. 이는 자유 시장의 요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취약점 제거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강제적 행위이다.

셋째: 팍스 실리카의 모순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주장과 정확히 정반대의 사실을 증명한다. 즉, 당신들은 “파트너”가 실질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을 때 이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그에 대해 보상하기는커녕 그들을 “도둑”이라 부르며 그들의 산업을 빼앗으려 든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이 정말 우스꽝스러운 대목이다. 팍스 실리카를 “자본주의 프로젝트”라 부르는 것은 모순의 극치이다. 미안하지만 화웨이(Huawei)가 절반의 비용으로 더 우수한 AI 칩을 제공함에도 계약상 구매가 차단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결론
당신은 잘 모르는 듯하니 말해주자면(당신처럼 정부 권력과 기업 이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커리어 전체를 보낸 사람이라면 이해할 만도 하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란 시장이 결정하도록 맡겨두는 것을 의미한다. 팍스 실리카는 이와 정확히 정반대이며, 오로지 이러한 시장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

Related post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에게…리야드의 중심에서 전하는 메시지

트럼프, 이란과의 전쟁 재개 태세 갖춘 듯

‘장기판의 말’에서 ‘혈액팩’으로?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이 인도에 던지는 함의

실무 총괄이 폭로한 미·중 정상회담의 ‘빈껍데기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