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화논평

객관적 추세로서의 다극화ㅡ 국제 이중권력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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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브릭스 15차 정상회담은 국제사회의 다극화 진행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개방, 포용, 협력, 상생의 기치를 내걸고 2023년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이 회의는 코로나19 발생 이후 브릭스 국가의 첫 오프라인 정상회담이었으며, 60명 이상의 세계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회의에 초대되는 등 브릭스 협력 메커니즘이 설립된 이래 최대규모였다.​

정상회담 마지막 날 ‘요하네스버그 2차 선언’을 통해 회원국들은 정치·안보, 경제·금융, 문화·인적 협력이라는 3개의 기둥 아래 호혜적인 브릭스 협력 틀을 강화하기로 약속하는 한편 새로 6개국을 브릭스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브릭스는 기존 5개국에서 11개국으로의 늘어나게 되었다.(이후 아르헨티나가 정권교체로 불참함으로써 현재 10개국인 상황)​

15차 브릭스 정상회의를 계기로 지금 국제무대에는 사실상 두 개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되었다. 하나는 ‘G7’로 불려지는 선진국 클럽(집단서방)이며, 다른 하나는 ‘브릭스’로 불려지는 신흥개도국 집단이다.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의 거시경제학 및 통화경제학 교수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는 이에 대해 “세계화가 미국의 ‘소프트 파워’와 달러 지배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미국과 서구 블록 전체에 보내는 분명한 신호입니다. 거기에는 최소한 두 개의 블럭이 존재하며, 즉 ‘Global North(북반구)’와 ‘Global South(남반구) ‘입니다.”라고 그 의의를 밝혔다. (울산함성)​

앞으로 이 두 개의 권력 간에 경제·정치·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둘러싼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정치적 측면

15차 브릭스 정상회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무엇보다도 회원국 확대를 들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레이트, 이집트, 에디오피아 5개국이 새로 브릭스 회원이 되었다. 이들 국가들은 2024년 1월 1일부로 회원 자격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회원국 수의 증가는 브릭스가 개도국(남반구)의 대표성을 획득하는데, 그리하여 기존 주류적 질서를 대표하는 G7(집단서방)과 맞서는 국제적 기구로 변신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브릭스는 2008년 처음 출범한 이래 15년의 세월을 겪으며 4개국에서 5개국으로 그 기반을 충실히 닦았다. 그리고 이제 내공을 기르는 단계를 지나 본격적으로 양적인 확산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새로 가입한 국가들의 지리적 분포를 보면 아프리카(2)와 중동(3)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번 회원국 확대가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가 연접한 지역에 집중된 점에 주목해, 일각에선 이번 확충이 중동 정세와 석유에 대한 통제에 초점을 맞추어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기존 브릭스 5개국은 모두 경제, 정치, 인구·국토 면적 등에서 하나 같이 대국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 회원국 수는 비록 5개에 불과하였지만, 그간 ‘상징적’으로 전체 개도국 진영을 대변해 왔다. 새로 브릭스에 가입한 5개국은 기존 5개국에는 미치지 못할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국가들이다. 기존 브릭스 5개국을 개도국 진영의 ‘1선 국가’라고 부른다면, 상대적으로 이들 국가는 ‘2선 국가’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참여로 인해 브릭스의 개도국 진영에 있어서 대표성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이제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명실상부하게 남반구를 대표한 기구가 되었다.​

특히 사우디, 이란, 아랍에미레트와 같은 산유국이자 중동 강국들의 브릭스 가입은 국제정세에 있어 큰 파장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군사적으로 이들이 위치한 중동지역에서 이제 미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절대적인 패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미국의 ‘페트로달러’의 지위가 이들의 이탈로 인해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번 정상회의 의장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라마포사(Ramaphosa) 대통령은 BRICS에 새로운 회원을 가입시키는 것은 그룹 확장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앞으로도 2차, 3차의 확충이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뜻한다. 이에 따라 브릭스의 영향력과 국제적 지위는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미 20여 국가가 가입신청을 하였다는 보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순차적으로 회원국으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15차 브릭스 정상회의가 갖는 또 다른 정치적 의미는, 이처럼 양적 확대를 계기로 브릭스가 단순히 G7이 주도하는 기존 국제질서 내에서의 부분적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에서, 새로운 대안적 질서를 제시하고 실제 이를 추진하는 세력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더욱 분명히 한 점이다. 정상회의 마지막 날 발표된 선언문에는 이러한 점들이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브릭스 지도자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포함한 유엔의 조직을 보다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선언문은 “우리는 유엔을 보다 민주적이고, 대표적이며,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고, 안보리 회원국에서 개발도상국의 대표성을 높여 현재 세계적인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안보리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혁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선언문은 세계무역기구(WTO)를 핵심으로 하는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하고 예측 가능하며, 포용적이고 공평하며, 비차별적이며 규칙 기반의 다자간 무역 시스템을 유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브릭스 국가들이 세계 경제에 대한 위험과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는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거시적인 경제정책 조정을 강화하고, 경제 협력을 심화하며, 강력하고 지속 가능하며 균형 잡힌 포괄적인 경제 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한다.”라고 하면서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 협력과 거시경제 정책 조율 심화를 약속했다.​

이와 함께, 브릭스 회원국들이 그룹 내 금융 결제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에서 국가 통화 사용을 지지한다고 밝히 내용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예컨대 “우리는 BRICS와 그 무역 상대국 간의 국제무역과 금융 거래에서 현지 통화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BRICS 국가 간의 통신 은행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현지 통화로 결제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선언문은 우크라이나 분쟁, 이란 핵 문제, 군축·비확산 강화 촉구 등에 대해 브릭스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는 등 국제적인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이처럼 브릭스의 회원 확장과 국제 쟁점에 대한 적극적 입장 표명에 대해, 미국 일간지 <내셔널닷컴>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심각한 결함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드러낸다고 보도했다. 즉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 ‘글로벌 사우스(개도국)’ 국가의 두 가지 핵심 요구인 경제발전과 주권 보장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해서 세계질서의 대체 구조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라고 해석하면서, 브릭스 협력 메커니즘과 상하이 협력 기구는 이러한 실패에 대한 두 가지 대응이라고 했다.​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 또한 사설에서 “비서구 국가는 앉아서 미국과 서방이 깨닫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 브릭스 협력 메커니즘 등의 노력을 통해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 개혁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며, 미국 서방 국가가 이에 빨리 따라오기를 바랄 뿐이다.”(환구시보, 2023.8.22.)라면서 브릭스가 국제적 사안에 대한 대응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전환하게 된 동기 및 자세를 밝혔다.​

이처럼 브릭스는 이제 단순히 G7(집단서방)이 주도하는 기존 국제질서 내부에서의 부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대안적 질서를 제시하고 실제 이를 추진해 가는 세력으로 자신의 위상을 전환했음을 알 수 있다.

글: 김정호 (울산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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