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의 관련 속에서 다극화의 진보성에 대해서 살펴본다.
어떠한 국제질서이든 그것이 진정으로 ‘진보적’ 성격을 갖기 위해선 즉 궁극적으로 인류해방에 기여하기 위해선 각국의 생산력 발전에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맑스는 일찍이 ‘생산력 발전’이야말로 인류 역사 발전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차’라고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신의 저서인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류가 해방되는 사회의 물질적 전제조건과 관련하여 생산력의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적 전제조건”이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생산력의 세계적 발전과 함께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고……지역적으로 국한된 개개인들을 세계사적이며, 동시에 경험적으로도 보편적인 개인들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 언어로 바꾼다면 더 높은 차원의 세계화(즉 ‘보편적 교류’)가 인류해방 사회의 구현을 위한 필요 조건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다극화가 세계화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는 그 진보성을 판단하는데서 빠트릴 수 없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다극화가 브릭스 등 개발도상국 진영이 주축이라면, 이는 경제 일체화와 전반적인 세계화의 진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사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화한 세계화 과정은 그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이 주도했으며, 개발도상국들은 줄곧 피동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2000년대 들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국가들의 발전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유럽·일본 등 서구 선진국들은 경제 침체와 금융위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국가들은 객관적으로 보자면 서구 주도의 초기 세계화 과정의 수혜국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자국 경제의 산업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 국가는 자연히 세계화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은 점차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이후 다자간 국제 무역 협상에 임하는 태도이다. 최근 들어 WTO 협상에서 서구 선진국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불평을 자주 털어놓는다. 그 요지는 그간 신흥 공업국들이 과거 수십 년간 세계화와 선진시장 개방에 따른 혜택은 충분히 향유 하면서도, 세계 무역체계에 있어 상응한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 선진국은 소위 ‘공평 무역’과 ‘대등한 개방’의 시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 자신들의 다자간체제에 대한 주도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됨에 따라 소위 ‘순서 있는 협상(quential negotiation)’ 모델을 채택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즉 먼저 지역과 쌍무 차원에서 개별 협상을 진행하여 높은 수준의 FTA를 본보기로 만든 후, 이것을 근거로 다른 개발도상국들도 이 같은 협상 내용에 따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서구 선진국들이 애초 자신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전 지구적 다자간 무역체제(WTO)를 스스로 멀리하는 것이며, 다자간에서 지역 내지는 쌍무 간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뜻한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의 트럼프 정부와 바이든 정부는 중국을 겨냥한 디커플링(탈동조화) 내지는 디스리스킹(탈위험)을 들먹이며 노골적으로 주변국들에게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 이 같은 편 가르기는 분명 집단서방이 그동안 추진해온 급진적인 세계 단일 시장 구축 전략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브릭스와 개발도상국들은 오히려 각종 국제회의나 주요 정상회담을 통해 WTO 체계의 복원과 공정한 자유 무역 질서의 구축을 지지하고 있다. 얼마 전 브릭스를 이끄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회담을 가진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도 그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투명하고 비차별적인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발전을 강조한다.
러-중 양국은 WTO 범위 내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기구(WTO) 개혁을 촉진하고, 분쟁 해결 메커니즘의 정상적인 작동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포함하여, 제13차 WTO 장관 회의의 결과를 이행하기 위한 노력을 지원할 것이다. 러-중 양국은 세계무역의 분열, 보호주의의 성장 및 불공정 경쟁을 유발하는 다자간 무역, 금융, 에너지 및 교통, 운송 기관의 활동을 포함하여 국제경제 관계의 정치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러 정상 공동 성명. 2024.05.16~17
(인용문 중 굵은 글씨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또 중국이 2013년 처음 제창하고, 전 세계 152개 국가 및 32개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는 ‘일대일로’ 공동사업은 브릭스 주도의 야심 찬 세계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천명하는 이념 및 실제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개방성, 포용성, 평등과 호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 집단서방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세계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 (관련 내용은 <울산함성> 이 총 5회에 걸쳐 연재한 “ ‘일대일로’와 신국제질서의 형성”을 참조.)

이상 서술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개발도상국 진영이 추동하는 오늘날의 다극화는 세계화를 한 단계 추진하는 의미를 지닌다. 어차피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한 인류의 생산력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이제 다시 세계화 이전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는 오직 이 과정을 더한층 철저하게 추진함으로써만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다극화와 그에 기초한 민주적인 신 국제질서의 수립은 각국이 진정한 비교우위 및 자주적이고 호혜 원칙에 입각한 세계화를 통해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고질적인 문제인 세계적인 ‘과잉 생산’과 ‘저개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인류가 진정한 ‘인류 운명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있어 튼튼한 정치·경제 및 인문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글: 김정호 (울산함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