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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의 계속된 동진(東進) 공세는 워싱턴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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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서구의 팽창 논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서방은 그런 약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독일 통일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기밀 해제된 외교 문서들은 무기력한 러시아를 상대로 워싱턴이 주도한 외교 공세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유럽의 우려와 이의 제기는, 이미 속도를 높인 나토 확장의 행진을 멈춰 세우지 못 했다.

프랑스의 전 총리 알랭 쥐페(Alain Juppé) 에게는 이미 논쟁의 여지가 없다. “소련 붕괴 이후 우리는 러시아를 새로운 세계 질서에 참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푸틴의 편집증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그는 러시아 제국, 아니면 소비에트 제국을 재건하려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문제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탓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르몽드>, 2025년 9월 11일자) 이처럼 널리 공유된 견해에 따르면, 나토의 동진(東進)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불만은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서방의 주류 시각에 따르면,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을 단지 묵인한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워싱턴, 브뤼셀과 협력하며 일정한 이익을 얻었고, 한때는 스스로 나토 가입을 타진하기도 했다. (실제로 1990년대 초 옐친 정부는 서방과의 협력을 모색하며 ‘가입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따라서 동맹국들이 발트 3국을 러시아의 제국주의로부터 보호한 것은 정당했지만, 우크라이나를 방치한 것은 서방이 러시아의 공격성을 과소평가하고, 군사적 대비를 소홀히 한 외교적 ‘순진함’의 결과였다는 평가로 이어진다.(1) 이런 분석에서 서방은 한 가지 결론을 끌어낸다. 러시아를 더 이상 신뢰하지 말 것, 그리고 그 나라가 패배하거나 지쳐 무너질 때까지 싸울 것.

그러한 서방의 주류 시각과 달리, 미국의 역사학자 메리 엘리스 새럿(Mary Elise Sarotte)은 1990년대 나토의 동진(東進)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표준 연구서를 펴낸 바 있다.(2) 그녀는 10년에 걸쳐 자국의 외교 문서를 연구한 끝에, 2021년 12월 소련 붕괴 30주년을 맞아 방대한 저작을 출간했다. 불과 몇 달 뒤,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났다. 새럿은 자신의 연구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것을 경계해 왔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푸틴의 ‘편집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선의의 서방”이라는 신화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박한다. 책 속에서 조지 H. W. 부시와 빌 클린턴 두 미국 대통령은, 모스크바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계획을 밀어붙이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또한 그 정책이 초래할 위험─특히 우크라이나에 미칠 파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1990년대 내내 미국의 대(對)러 정책은 한 가지 패턴을 되풀이했다. 가능한 한 많은 선택지를 남겨둔 채 신중하게 전진하고, 러시아의 요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기회가 오면 속도를 높이고,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양보만 함으로써, 크렘린이 체면을 유지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나토 확장이라는 미국의 구상은 베를린 장벽의 첫 돌이 무너질 때까지만 해도 아직 완성된 청사진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마다 워싱턴은 언제나 모스크바에 가장 불리한 선택을 내렸고, 그 결과 러시아가 기만당했다고 느낄 만한 이유를 남겼다.

고르바초프, “독일 통일은 외교적 흥정 대상이 아니다”

세 가지 결정적인 순간이 이를 잘 보여준다. 1989년 11월 9일,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원회 대변인의 서투른 한마디(원래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여행이 허가된다”는 내용을 “새 여행 규정은 즉시 시행된다”고 잘못 발표했다)가 서독과의 국경 검문소에서 모든 통제가 해제될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당장 수많은 베를린 시민이 검문소로 몰려들어 국경을 넘기 시작했고, 당국은 그 거센 물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연방총리 헬무트 콜은 이 돌발적인 사태의 가속화를 재빨리 자신의 정치적 기회로 전환했다. 그는 같은 해 11월 28일, 두 독일 간의 연합 구상을 제안했다. 이 예고 없는 제안은 서방 동맹국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은 본(Bonn)과 모스크바가 자국을 배제한 채 비밀리에 ‘깜짝 합의’를 이룰 가능성을 우려했다.

만약 독일이 통일에 대한 소련의 승인을 얻는 대가로 나토 탈퇴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유럽 내 미국 존재의 핵심 고리가 끊어지는 것이며, 나아가 나토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국의 이런 우려는 터무니없는 공포가 아니었다. 이미 본과 모스크바 사이에는 비밀 외교 채널이 열려 있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발렌틴 팔린(Valentin Faline)은 1989년 11월 21일, 자신의 부하 니콜라이 포르투갈로프를 본으로 파견했다. 그는 두 개의 문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하나는 공식 문서, 다른 하나는 비공식 문서였다. 첫 번째 문서는 독일 정세에 대한 소련 당국의 일반적 우려를 담고 있었다. 두 번째 문서는 본 정부가 “독일 통일 문제를 구체적인 정치 의제로 제기할 의향이 있는지”를 타진하는 내용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크렘린은 독일 양국의 ‘향후 동맹 문제’를 재검토해야 하며, 파리조약(1955년 서독의 NATO 가입을 승인한 협정)과 로마조약(1957년 서독이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한 유럽경제공동체-EC, 현 EU- 창설 조약)의 ‘탈퇴 조항’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가 메리 엘리스 새럿(Sarotte) 의 요약에 따르면, “명확히 말해, 독일 통일을 원한다면 유럽공동체(EC)와 나토 양쪽에서 모두 탈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시에는 독일의 비핵화와 평화주의적 노선을 지지하는 강력한 여론이 존재했다. 이 점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중요한 협상 카드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팔린은 고르바초프에게 이 기회를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즉, “통일된 독일이 어떤 동맹을 택할 것인가—나토인가, 아니면 범유럽 안보체제인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라”는 제안이었다. 팔린의 생각에 그것은, 통일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고르바초프가 외교적 대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당시 서독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는 소련과의 타협 가능성에 열려 있었고, 워싱턴에서도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어느 정도의 양보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끝내 그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을 외교적 흥정의 대상이 아닌, 역사의 불가피한 흐름으로 받아들였다.

동쪽으로 단 한 치도

1990년 2월,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 외무장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일련의 협의를 시작했다. 세 사람은 후대에까지 회자될 비공식 구두 합의에 이른다. 즉, 독일이 통일될 경우, “나토의 영역은 동쪽으로 단 한 치도 확장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이었다. 이 베이커의 발언은, 나토 헌장 제5조, 즉 회원국이 공격받을 경우 집단방위를 발동한다는 ‘상호방위조항’이 통일 독일의 옛 동독 지역(구 동독, RDA)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이는 곧 나토의 전방선(前方線)을 동독 이전 위치에서 ‘동결’하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통령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에게 모스크바에 대해 보다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후 협상에서 미국 측은 “동독에 단지 ‘특별 군사 지위(statut militaire spécial)’를 부여한다”는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이 어휘상의 미묘한 변화가 담고 있는 전략적 함의를 즉각 파악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프레데리크 보조(Frédéric Bozo)의 설명에 따르면, 이 ‘특별 지위’란 동독 지역의 중립화나 비무장화를 뜻하지 않으며, 통일된 독일 전체가 나토와 그 통합 군사체계 모두에 완전한 회원으로 남게 된다는 의미였다. (3) 이 중대한 전략적 ‘뉘앙스’를 명확히 하기 위해 부시는 1990년 2월 9일,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이 모스크바로 출발하기 직전 그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크렘린은 의도적으로 이 모호한 상황을 그대로 유지했다.

독일 총리 헬무트 콜은 고르바초프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미국의 강경한 입장 전환을 따르지 않고 1990년 2월 10일 소련 지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토는 현재의 동독 영토로 그 세력을 확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콜은 소련 경제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안보 문제에서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은 채, ‘도이치마르크’(Deutsche Mark)로 독일 통일을 사버릴 수는 없을까?’

1990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독일 통일 조약(모스크바 조약) 서명을 앞둔 시점에 재정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콜은 소련에 120억 마르크의 지원금과 이자 없는 30억 마르크의 대출을 약속했다. 그러나 군사 문제는 여전히 교착 상태였다. 콜은 스타브로폴(Stavropol)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소련 측으로부터 나토 헌장 제5조(집단방위조항)의 적용 범위를 동독 지역까지 확대하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그 대신 그는 핵탄두 배치와 외국군의 주둔 및 배치를 금지하는 조건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 절충안은 이미 소련의 초기 요구를 크게 후퇴시킨 것이었지만, 워싱턴은 그것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국의 강경한 태도는 9월 12일로 예정된 모스크바 정상회담 자체를 무산시킬 뻔했다. 이에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은 강하게 우려를 표했다. 회담 전날, 각국 대표단이 프레지던트 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그는 한밤중에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를 깨웠다. 메리 엘리스 새럿의 묘사에 따르면, “새벽 1시경, 미국 대표단은 조깅복과 가운 차림으로 그를 맞이했다. 베이커는 방금 알코올과 수면제를 함께 복용했지만 협상가로서의 능력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심야 협상은 결국 새로운 절충안으로 이어졌다.
합의문 본문에는 소련 측이 제시한 문구 일부가 포함됐다. 즉 “이 지역(동독)에 외국군과 핵무기, 또는 핵무기 운반체계가 주둔하거나 배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비공식적인 부속 문서를 첨부해, 통일 독일 정부의 결정에 따라 일시적으로 외국군—사실상 미군—의 배치를 허용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소련 대표단은 이 교묘한 문구 조정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후퇴 규모를 부분적으로 감춘 절충이었다. 베이커의 보좌관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 은 훗날 이렇게 인정했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언젠가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한다면, 미군이 동독을 거쳐 폴란드에 주둔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비셰그라드 그룹의 조급함

통일된 독일이 나토에 통합되면서, 백악관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군사동맹을 더 동쪽으로 확장할 것인가? 미 행정부 내부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두 번째 중대한 분기점을 맞았다. 대통령 측근 중 일부는 소련의 극적인 약화를 역사적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세력 부활은 물론, 장차 잠재적인 경쟁국이 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다른 고위 보좌관들은 이런 전략이 너무 성급한 질주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의 유럽·캐나다 담당 보좌관이던 토머스 나일스(Thomas Niles)는 이렇게 경고했다. “나토의 확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강요할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지원국-러시아를 포함한-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냉전 시절의 분단선을 대신할 새로운 경계선을 유럽에 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확대를 시작하면, 정치적으로 그 흐름을 멈출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일스와 다른 관료들은 나토의 확장이 오히려 모스크바의 협력이 필요한 주요 현안들을 교착시킬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예컨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의 위기관리(당시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지했다)나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핵군축 협상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처음에는 신중함이 우세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커다란 불확실성을 초래했고, 이에 워싱턴은 포용적인 접근을 택했다. 1994년 1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 for Peace, PPP)’이 출범했다. 이 나토(NATO) 협력 제안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속했던 옛 사회주의 국가들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개방된 것이었다. 그러나 비셰그라드 그룹(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들은 1992년 5월 6일 공식적으로 나토 가입을 신청하고도, 정식 회원국이 되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동맹의 주변부에 머물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PP)의 구상은 우크라이나 문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워싱턴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독립 이후 자국에 남아 있던 소련 핵무기를 러시아─소련의 법적 계승국─에게 넘기도록 설득하려 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핵무기의 ‘발사 버튼’을 실제로 통제한 적은 없었지만, 국가 체계가 무너진 혼란 속에서 핵무기나 핵물질이 범죄조직을 통해 유출될 위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비셰그라드 국가들의 요구대로 나토가 조기에 1차 확장을 단행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회색 지대’에 갇히게 되어 핵탄두 포기 의지를 잃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나토가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까지 단숨에 확장한다면,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있던 보리스 옐친(Boris Eltsine)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릴 위험도 있었다. 이는 1993년 러시아 의회 반란 사태가 이미 보여준 바였다.(4) 따라서 미국 행정부는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PP)을 통해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의 조급함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1994년 2월, 크림반도에서 분리 독립 운동이 격화되는 가운데 클린턴 대통령은 헬무트 콜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력 때문이든, 혹은 국내 민족주의자들 때문이든 내부적으로 붕괴한다면, 그것은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 전체의 논리를 무너뜨릴 것입니다.”(5)

1994년 말, 워싱턴은 노선을 바꿨다. 중간선거가 다가오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점차 자신의 국가안보보좌관 앤서니 레이크(Anthony Lake)가 대표하는 강경파 노선에 가까워졌다. 레이크는 같은 해 12월 1일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이사회 정기 회의에서 본격적인 움직임을 개시했다. 러시아 측은 그날의 회의가 언제나처럼 형식적인 절차로 끝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외무장관 안드레이 코지레프(Andreï Kozyrev)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화유지 작전에서 나토와 협력하기 위한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PP) 문제를 논의하고자 직접 브뤼셀을 방문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가 단순한 참가국을 넘어 나토와 협력하는 특별 파트너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특별 지위’를 명시한 부속 의정서를 추가하길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지레프의 일정은 뜻밖의 전화로 중단되었다. 그는 브뤼셀에서 駐 벨기에 러시아 대사와 테니스를 치던 중, 분노에 찬 보리스 옐친(Boris Eltsine)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옐친은 방금 언론 보도를 통해 회의 최종 공동성명 초안을 접한 참이었다. 그 문서에는 나토가 “확장의 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검토 절차를 시작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나토 확장은 더 이상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이미 독일은 통일 이후 나토 체제 안에 편입되었고, 동맹 확대의 원칙 또한 공식적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이제 남은 질문은 단 하나였다─“나토는 어떤 나라들까지 품을 것인가?” 비셰그라드 그룹(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까지만 확장을 제한해야 하는가, 아니면 러시아 국경선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가? 1996년 무렵, 미국은 이미 완전한 외교적 자유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12월 발효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서명하며, 자국이 보유한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는 대신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단순한 ‘안전보장’─즉, 법적 구속력이 없는-확약만을 받았다. 한편 독일 주둔 러시아군은 수천만 마르크의 추가 보상을 받고, 예정보다 4개월 앞선 1994년 여름 비공식적인 의식을 끝으로 독일 영토에서 철수했다. 반면 서방 연합군은 그해 8월 31일 베를린에서 대규모 공식 기념식을 열고 철수를 마무리했다.

러시아는 돈으로 살 수 있다

미국은 과거의 거대 경쟁자였던 러시아의 경제적 취약성을 가차 없이 활용했다. 옐친 대통령은 소수의 올리가르히(재벌)들과 서방 출신 경제 자문단의 영향 아래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그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선의’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6) 1995년 3월, 워싱턴을 방문한 덴마크 총리에게 클린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원칙적으로 러시아는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불과 몇 주 앞두고, 클린턴은 IMF 총재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IMF는 러시아의 부실 위험을 알고도 102억 달러의 신규 대출을 승인했다.(7)

이러한 상황에서 클린턴은 옐친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모스크바가 뭐라 하든, 나토 확장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만 미국 행정부는 러시아 대선이 끝날 때까지 공식 발표를 미루기로 하고, 그동안 확장 준비 작업을 조용히 계속했다. 클린턴은 첫 번째 확장 선언과 함께 “나토의 문은 앞으로도 열려 있으며, 발트 3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도 가입할 수 있다”고 발표할 계획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옐친은 1997년 5월, ‘러시아─나토 기본합의’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평화의 구축’을 명목으로 한 협력 문서였으나, 서방은 이를 러시아의 묵시적 동의, 즉 나토 확장에 대한 승인으로 해석했다. 이를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워싱턴은 추가로 40억 달러의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이 러시아에 제공한 전체 원조액과 맞먹는 규모였다. 이때 러시아 외무장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는 미국 국무부 차관보 스트로브 탤벗(Strobe Talbott)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들이 미국이 돈으로 러시아를 매수해 나토 확장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양측은 실제 지원 규모를 의도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공식 발표에서는 상징적인 대가만 강조됐다. 즉, 러시아의 G7 참여, 세계무역기구(WTO), 파리클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편입 추진 등이 그것이었다.

나토(NATO)의 확장을 막지 못한 크렘린은 여러 차례 서방에 러시아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타진했다. 처음으로 그런 제안을 한 인물은 1990년 5월 25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이후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역시 여러 외교적 선택지 중 하나로 러시아의 나토 통합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냉전 이후에도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있던 동서 간의 분단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는 서방의 군사동맹에 맞서는 적대적 세력이 아니라, 새로운 유럽 안보 질서 속에서 협력 파트너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은 전술적 이유로, 러시아가 언젠가 서방 군사동맹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는 형식적이고 이론적인 가능성만을 암시하며 그 기대를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의 스트로브 탤벗은 1996년 7월 9일,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에게 보낸 메모에서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가 나토에 가입하고 싶다면, 티켓을 사고 정원에서 기다리게 하라.” 그는 1994년 체코 외교관들에게 “러시아가 결코 나토나 유럽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라며, “그런 발언은 러시아 내부에 부정적 반응을 일으킬 뿐 아니라, 실제로 나토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는 옛 소련 국가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토 확장이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유럽 각국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헬무트 콜의 의견이 일부 고려된 것을 제외하면, 파리·베를린·런던은 모두 나토의 확장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지만, 러시아 국경에 이르는 확장을 막지는 못했다. 더구나 유럽은 나토를 대체할 만한 범유럽 안보체제의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물론 프랑스는 1989~1990년에 ‘유럽안보협력회의’의 강화를 추진했지만(8), 만장일치 원칙이 의사결정을 마비시켜 이 조직은 민주주의 촉진이나 소규모 평화유지 임무 같은 부차적 활동에만 머물렀다.

파리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게는 두 가지 최우선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통일된 독일의 잠재적 영토 수정주의를 억제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독일을 유럽 통화 통합 구상에 견고히 묶어두는 것이었다. 그는 군사동맹(나토)의 팽창보다 유럽 자체의 정치·경제 공동체가 지나치게 커져서 내부 단합이 약해지는 위험을 더 경계했다. 따라서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오데르-나이세(Oder-Neisse) 선을 독일-폴란드 국경으로 인정받고, 이어 단일통화 도입(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대한 동의까지 확보하자, 미테랑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의 후임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는 나토가 유럽 안보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는 현실을 인정하며 동유럽 확장 과정에 동참했다. 그는 루마니아의 나토 가입을 적극 지지했고, 프랑스의 통합군사지휘체계 복귀(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시 실현)를 준비했다. 프랑스의 요구로 1997년 체결된 ‘러시아-나토 기본협정’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되었다. “나토는 집단방위 임무를 수행할 때, 새로운 병력을 대규모로 동유럽에 상시 배치하는 대신, 회원국 군대 간의 작전·통신·장비 체계를 서로 연동시켜 함께 작전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 조항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선언적 합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시라크는 러시아의 반발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1996년 11월 1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앤서니 레이크(Anthony Lake)에게 “우리는 그들을 너무 모욕했습니다. 러시아의 상황은 매우 위험합니다. 언젠가 민족주의의 역풍이 불어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헬무트 콜 역시 같은 우려를 공유했다. 그는 옐친이 독일 내 러시아군 철수를 성실히 이행한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미국의 강경파가 모스크바의 약세를 이용해 양측의 장기적 관계를 훼손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영국 또한 비공식적으로는 새로운 회원국 확대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러시아 국경에 바로 인접한 발트 3국 방어를 위한 집단방위 약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 주도의 나토 확장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서유럽은 자신들이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그 결정의 사후관리자 역할에 머물렀다. 1990년대 말, 유럽은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관계의 균형을 모색했다. 1997년에 시작된 노르드스트림 1·2 가스관 프로젝트는 그 상징이었다. 러시아는 유럽 시장에 의존했고, 독일은 러시아산 가스에 의존했다. 또한 베를린과 파리는 러시아를 유럽 안보 체제의 주변부라도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상회담에서 EU와 러시아는 경제·안보·법질서·문화 등 ‘4개 공동 공간’(four common spaces) 구축에 합의했으며, 그중 안보 협력 분야에는 러시아 장교 한 명이 유럽연합 군사참모본부에 상주하도록 하는 조치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형식적 수준에 머물렀고, 실질적 진전은 없었다. 전 프랑스 대사 장 드 글리냐스티(Jean de Gliniasty)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러시아는 장비나 병력을 EU에 제공했지만(예: 차드 파병), 의사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9)

유럽이 나토의 동진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분명 존재했다.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담에서 자크 시라크와 앙겔라 메르켈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후보 지위 부여를 저지하기 위해 밤새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최종 공동성명에는 두 나라가 “언젠가 나토에 가입할 자격이 있다”는 문구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단지 그 시기를 뒤로 미루는 데 성공했을 뿐, 나토 확장 자체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조약 제안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i Medvedev)가 러시아 대통령에 취임한 2008년, 유럽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그해 여름, 조지아 정부가 자국 내 친러 분리 지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무력으로 재점령하려 하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 개입에 나섰다. 이 사건 직후, 메드베데프는 서방과의 긴장을 완화하고 새로운 유럽 안보 질서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유럽 안보 조약 초안’을 제안했다. 핵심 내용은 유럽 내 모든 안보 기구-나토를 포함해-를 포괄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고, 그 안에 러시아를 정식으로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 상원의 한 보고서는 당시 이렇게 분석했다. “이 조약은 러시아가 일방적 무력 사용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유럽 국가들과 미국 또한 같은 제약을 수용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만약 이 초안이 그대로 채택된다면, 나토는 안보 의사결정의 우선권을 상실하고, 모든 군사행동은 결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99년 유고슬라비아 공습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제안은 논의할 가치가 있다.”(10) 그러나 이 제안은 서방의 아무런 공식 답변 없이 묵살되었다.

2010년 6월,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메드베데프의 안보 구상을 다소 완화한 형태로 다시 제안했다. 이른바 ‘메제베르크(Meseberg) 구상’이라 불린 이 제안에 대해 프랑스는 지지 입장을 보였으나, 다수의 유럽 회원국들은 러시아가 먼저 몰도바 내 친러 분리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e) 문제에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전 프랑스 대사 장 드 글리냐스티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메드베데프와 메르켈은 오히려 트란스니스트리아 문제부터 이 새로운 안보체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브뤼셀은 그 문제 해결을 오히려 조약의 전제조건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결국 2013~2014년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혁명과 크림반도 합병을 계기로 결정적인 단절에 이르렀다.(11) 파리와 베를린은 민스크 협정을 중재하여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세력을 동결시키고 정치적 해결 절차를 제시했으나, 실제로는 키이우 정부가 그 이행을 미루도록 방조하며 불안정한 ‘현상 유지’를 택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모스크바가 더 이상 서방의 영향력 확대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유럽 안보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시도는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글 · 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언론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1) Sylvie Kauffmann, 『눈먼 자들 — 베를린과 파리는 어떻게 러시아에 길을 내주었는가』, Stock, 파리, 2023.
(2) Mary Elise Sarotte, 『단 한 치도 동쪽으로 — 미국, 러시아, 그리고 탈냉전 교착의 형성』, Yale University Press, 뉴헤이븐, 2021.
(3) Frédéric Bozo, 『미테랑, 냉전의 종식과 독일 통일』, Odile Jacob, 파리, 2005.
(4) Jean-Marie Chauvier, 「1993년 10월: 대포 소리 속의 러시아 자유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0월호.
(5) 「미국 국무장관이 본 본 주재 미 대사관 전문 ‘클린턴-콜 오찬 회담 기록(1994년 1월 31일)’」, 1994년 2월 12일자, 메리 엘리스 새럿, Not One Inch 인용문.
(6) Ibrahim Warde, 「자유주의 혁명의 조력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2년 5월호.
(7) 「워싱턴이 러시아 대선을 조작하던 시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9년 3월호.
(8) 「러시아가 유럽을 꿈꾸던 시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8년 9월호.
(9) Jean de Gliniasty, 「유럽의 평화, 외교 경로의 실패」, “유럽 안보 구조의 미래는 무엇인가?” 학술회의 발제, Fondation Res Publica, 파리, 2025년 3월 26일.
(10) Yves Pozzo di Borgo, 「유럽연합과 러시아 간의 특수 전략적 파트너십을 위하여」, 프랑스 상원 외교·방위위원회 및 유럽위원회 공동보고서, 2011년 6월 22일 제출, 파리.
(11) Olivier Zajec, 「선한 자들, 악당, 그리고 크림반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4월호.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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