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유럽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기를 선호한다는 것, 그들이 평화를(적어도 ‘빠른’ 평화를) 두려워한다는 것, 많은 이들이 유럽이 이미 전쟁 중이라고 믿고 그것을 실제 사격전으로 바꾸는 데 “의욕적(gung ho)”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러시아에 패배를 안기려는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훨씬 덜 분명한 것은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이다. 올해의 전개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하나의 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이 광기 속의 하나의 방식(method).
우리는 지금 차이텐벤데(Zeitenwende: 시대전환) 속에 살고 있다. 이 단어가 영미 언론에서 발음될 때의 전율을 보면, 마치 “독일인들이 다시 전쟁을 좋아한다”는 뜻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릿트아니아 숲 속 탱크들 앞에서 횃불 의식을 하는 독일연방군 홍보 영상에 반지의 제왕 음악이 깔린다거나, 한 장관이 고등학생들을 전쟁 준비시키고 싶어 한다거나, 혹은 독일이 징병제를 부활시키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차이텐벤데는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전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가 선언했던 그 시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찾아온 역사적 전환기를 말하는 것이다. 숄츠의 선언 3년 후이자 올해 1월 취임 직후, 미국 국무장관 마르코 루비오는 단극체제(unipolar moment)는 일시적 예외였으며—세계가 다시 다극 질서로 회귀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국이 강대국으로서 자리할 공간이 있다고 말했다.
루비오의 임상적 진단 이후, 우리는 유럽 외교정책 엘리트층이 계속해서 발밑을 잡아끄는 카펫을 당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고 있다: 뮌헨안보회의에서 피트 헥세스의 거친 일갈,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제이디 밴스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몰아붙인 사건, 몇 일 만에 무너진 프랑스의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 파견 선언, 알래스카에서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상회담, 그리고 교장실에 불려간 아이들처럼 그의 책상 앞에 줄지어 선 유럽 지도자들, 또 유럽 지도자들이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를 “종이호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환호한 뒤, 그 말이 사실상 자신들이 홀로 이 짐승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임을 뒤늦게 깨닫는 장면까지.
11월 19일, 혹독한 조건을 우크라이나에 부과하는 미국 중재 평화안이 보도됐다. 이 소식은 유럽 지도자들에게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한 미국 관리는 모욕을 더했다. “우리는 유럽인들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처음 48시간 동안 유럽은 충격과 침울한 침묵으로 반응했다.
미국인들은 주로 이 초라한 광경을 보았다. 반면 유럽인들은 엘리트들이 재무장 광기에 빠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여기에는 날카로운 공포 조장(“평화로운 마지막 여름”), 억지스러운 교관 흉내, 현기증 나는 전쟁 이윤이 특징이다. 진부한 클리셰도 남아나지 않는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전쟁하기엔 너무 물렀고,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이지 않으려는 자는 공공 사기에 위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유럽 엘리트들의 광기를 무엇이 설명하는가? 왜 그들은 재정 규율을 내던지며, 더 많은 긴축으로 시민들을 소외시키고는 불만을 꾸짖으며, 무역에 대한 기존 입장을 순순히 포기하고, 심지어 민주주의까지 중단하려 하는가? 왜 20세기 초의 썩은 군국주의 선전을 되살리는가?
유럽, 홀로 Europe, Alone
냉전이 끝났을 때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게 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나 울포위츠 독트린 같은 이론들이 단극 현실을 일종의 명령(mandate)으로 바꾸었다. 미국의 글로벌 패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되어야 했고, 군대는 전 세계 어디에서든 도전자를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필요하다면 동시에. 지역 강대국들은 미국에 군사·경제적으로 크게 뒤떨어져 있었고, 미국의 우위에 굴복해야 했다. 이에 따라 군사 동맹, 특히 NATO가 확대되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미국 내 새로운 사상가들이 패권 추구는 지속 불가능하며, 국가안보에 해롭고, 민주주의와 사회적 안녕에 파괴적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패권(primacy)’은 미국 정치 스펙트럼의 많은 영역에서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유럽에 전달되지 않았다.
브뤼셀의 핵심부에서도 감지되지 않았다고 유럽의회 전 수석 외교정책 보좌관 엘다르 마메도프는 말한다. “미국이 왜 유럽을 도와 러시아를 무너뜨리려 하겠냐고 내가 유럽 정책결정자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리더십, 지배, 패권을 언급한다. 마치 워싱턴에서 패권이 더 이상 좋은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하듯이.”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NATO 회원국들에게 더 많은 방위비를 요구했던 일이 놀라울 것도 없었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 동맹국들에게 군비 지출을 늘리라고 요구해왔다: 1950년대에는 소련 억제를 위한 기여로서, 1990년대 이후에는 공동의 글로벌 패권 프로젝트 자금 분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 내 군사 주둔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기도 했다. 이는 미국 글로벌 패권의 왕관 보석이자 핵심 거점이었다.
오늘 유럽 지도자들이 동결 러시아 자산을 담보로 차입하려는 고위험 도박과 같은 조치들을 모색하는 것은, 미국 패권 종식이 미국보다 유럽에 훨씬 더 심대한 지위 상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이며, 다극 질서의 확고한 한 축이다. 그러나 유럽은 홀로 있을 때, 군사력과 힘의 정치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강대국인가? 유럽 시민들이 그걸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과 반드시 따라오는 강대국 경쟁—민주주의를 독성으로 물들이고, 불평등을 악화시키며, 전 세계 평화를 위협할—을 원하는가? 누구도 유럽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아무런 숙고 없이 공포와 군비 경쟁으로 몰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의 NATO 공격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유럽의 정치 인플루언서들은 푸틴이 광기에 찬 정복자로 나타나 나라들을 차례로 공격하며(논리적으로 불가능함에도) 점점 강해진다는 이야기를 즐겨 한다. 마크롱의 표현을 빌리면 “생존하기 위해 계속 먹어치워야 하는 포식자”라는 괴물이다.
브뤼셀 싱크탱크 브뤼겔도 이렇게 설명한다: 러시아는 유럽을 공격할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 무기 범주의 물량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유출된) 러시아 측 자료는 물론, 현대 또는 과거 러시아 역사에서도 근거를 찾기 어렵고, 무엇보다 전략적 이유가 부족하다. NATO의 집단 군사력이 러시아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은 매우 잘 문서화된 사실이다.
올해 내내, 새로이 군국주의적 자세를 띠려 어색해하는 유럽의 선출직 대표들은 러시아의 공격 계획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렸다. 때로는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처럼 러시아군이 피레네산맥을 넘어올 리 없다며 실언을 하기도 한다.
일부는 또한 유럽의 유일한 구원책이라 주장되는 초대형 재무장과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전면적 군사화를 향한 압도적 움직임에 대해 수동적·공격적 저항을 보였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이 봄에 대대적으로 발표한 EU의 대출 기반 무기조달 기금 SAFE는 결국 신청 부족으로 끝났으며, 독일은 막판에 발을 뺐다.
NATO 회원국들은 트럼프가 요구한 GDP 대비 5% 국방비 지출에 립서비스를 보냈지만, 스페인은 사회적 평화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회원국들은 각종 편법 회계로 여기에 접근하고 있다: 다리 보수에서 AI 투자까지 무엇이든 국방지출로 계산될 것이다. 그럼에도 스페인의 5% 거부, 슬로베니아의 단명한 NATO 국민투표 시도, 헝가리의 만성적 비협조성 같은 불일치는 유럽 신군국주의의 전진을 늦출 뿐 막지는 못할 것이다.
유라시아의 패권
이스라엘과 미국의 6월 이란에 대한 불법적 공격에 대한 유럽 지도자들의 반응은 유럽의 신호전주의 이면의 동기를 더 명확히 했다: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이스라엘이 유럽의 “더러운 일”을 해주었다며 감사했고, 폰 데어 라이엔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설교하면서도 이란을 책망했다. 두 달 후, “E3”(독일·프랑스·영국)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재개했다. 표면적으로는 이란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조치는 트럼프에 대한 예비적 복종의 과시였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그를 달래려는 의도였다.
유럽의 신호전주의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지배에 관한 것이다.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한 불안은 종종 유럽국가의 지위에 대한 더 깊은 우려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캐나다 전문가 자카리 페이킨은 유럽 외교정책 관계자들과의 수개월에 걸친 인터뷰를 요약하며 말한다. 유럽 엘리트들은 자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서 편안히 누려온 패권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유럽의 정치인들, 외교관들, 원조 담당자들, 그리고 그들 곁에 붙어 다니는 평론가들은 권력정치의 수단을 넘어선 생활에 익숙해졌다: 다른 이들에게 거만하게 가치관을 강연하고, 제3국의 내정을 무겁게 간섭하며, 자원을 빼앗고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며, 리비아에서처럼 군사적 모험주의에 손대는 식이다. 미국의 패권이라는 편안한 그늘 아래에서 유럽 국가는 이기적이고 수익성 높은, 때로는 부도덕한 외교정책을 누릴 수 있었다. 만약 미국이 단극 시대의 글로벌 패권에 작별을 고한다면, 유럽인들은 대리적 패권의 위신을 잃고 전 세계의 국가들을 주권적 동등자로 대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은 유럽 외교정책 엘리트들의 신경 쇠약 직전까지 몰아넣는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서구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다—이상적으로는 과거처럼 미국의 네포티즘(nepo baby; 잘 난 부모덕에 성공이 보장된 금수저자식들)으로서—비록 제국이 무너지는 이 순간에는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유럽이 스스로의 안보를 책임진다”는 말은 이렇게 해석된다: 전쟁 관련 모든 것에 많은 돈을 쓰고, 미국의 터무니없이 비싼 방위산업에 대규모 주문을 넣어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러시아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뇌물이다. NATO 사무총장 마크 루테의 트럼프에 대한 비굴한 아첨이나, 유럽인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무기 배송 대금을 지불하는 최근의 합의는 그러한 생각을 드러낸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일류 오피니언 페이지들과 인터넷의 거친 구석들은 유럽인들이 미국의 속국이거나 자발적 속국화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 지도자들이 강압하에 행동하거나 가학적 성향을 즐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경제적 자해를 자행하고 스스로를 격하시키며, 그 대가로 얻을 보상—미국 패권의 대리적 향유—이 비싼 값을 치를 만큼 가치가 있다고 기대한다.
또 다른 대안으로, 일부 유럽인들은 미국의 그림자 밖에서 독립된 유럽 패권을, 세계의 세 번째 강대국으로서 꿈꾼다. 유럽은 전통이 있다: 영국은 세계 식민화를 “백인의 짐”으로 보았고, 프랑스는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을 주장했으며, 독일인은 덜 유명하게도 독일적 본질이 세계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EU는 우월감의 투영장치이자 그것을 실행하는 관료 기계 역할을 동시에 한다.
올해 내내 유럽 지도자들의 연설은 “더 나아지기”와 “승리”라는 말로 울려 퍼졌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더 똑똑하고, 더 강하며, 더 낫다; 우리는 이전에 러시아를 이긴 적이 있다. 이번에는 러시아를 이기지 못할 리 없다.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브뤼셀 내부의 환멸을 느낀 인사들은 초대 전용 모임에서 마메도프에게 이러한 믿음들이 널리 퍼져 있고, 불안할 정도로 천박하며, 결코 성찰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우리는 5억 명이고, NATO에는 10억이 있으며, 러시아는 1억 4천만이다”; “러시아의 GDP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간단한 산수로 우리가 러시아를 패배시키지 못할 수가 없으니,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를 패배시켜야 하고,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식이다.
오랫동안 망명 중인 전 러시아 중앙은행가 세르게이 알렉사셴코는 러시아의 임박한 경제 붕괴를 믿는 유럽의 신념에 대해 건조하게 “서방 정치인들은 스스로를 속이길 좋아한다”고 평했다. 그의 독일어 인터뷰어는 러시아를 정보전의 일부로서 폄하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며, 최근에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바꿀 역사적 기회”라며 떠들어댔다. 유럽이 러시아를 제자리에 가두는 데 드는 비용은 3,900억 달러로 “비싸다” 할 수 있지만, “매우 가치 있는 투자”라고도 했다. 유라시아에서의 패권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마메도프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 외교정책권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어떤 타협, 러시아가 지배하는 영토를 유지하는 어떤 제안도 패배에 해당할 것—공식 용어로는 EU의 전략적 패배—이며,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고 굴욕적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그토록 칭송받는 ‘안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유럽은 미군이 유럽에 주둔시키고 이제 철수하기 시작한 모든 군사 장비와 병력을 일대일로 대체해야 하는가? 어쩌면 전직 녹색당 독일 외무장관 요슈카 피셔가 로비 업계의 자리에서 요구하는 대로, 유럽이 지휘하는 자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하는가?
이것은 단순하고 불충분한 계산이다. 떠오르는 다극 질서에서 지구적 지정학의 판은 루빅스 큐브처럼 전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 칸을 돌리면 여러 면이 갑자기 달라 보인다. 더 이상 글로벌 패권자의 군사 기지이자 로켓 발사대로 기능하지 않는 유럽은 이웃국가들에게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 특권은 줄어들지만 위협도 줄어든다.
유럽의 안보를 정의하려면 학자들이 말하는 대(大)전략(grand strategy)이 필요하다 — “우리는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고, 그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질문은 아직 답해지지 않았다; 심지어 제기조차 되지 않았고, 물론 유럽 시민들에게는 전혀 제안되지도 않았다.
그러한 대전략으로부터 구체적인 외교·안보정책이 도출되고, 그로부터 좁은 의미의 군사전략—일정 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무기, 병력, 물류(그리고 모든 형태의 하이브리드 수단)의 배치—이 추론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재무장은 대신 미친 듯한 양상으로 보이며, 국방 로비스트들의 서류가방에 오래전부터 들어 있던 주문서의 항목들을 무작정 체크해 나가는 머리 없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급변하는 전쟁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올봄과 초여름 동·북부 유럽 대부분을 휩쓴 최근의 드론 광풍도 유사한 패턴을 따랐으나 속도는 훨씬 더 급격했다. 폰 데어 라이엔까지 이르는 EU 관리들은 이른바 ‘드론 월(drone wall)’을 구축하겠다고 말했고, 자금을 조달하고 실행하는 선봉을 자임했으며, 구체적 예산을 짰고 싱크탱크들로부터 열광적 박수를 받았다 — 모두 덴마크, 독일, 리투아니아에서 목격된 물체들이 러시아 소행의 드론이 아니거나 심지어 드론조차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드론 월’은 첨단 기술을 연상시키고,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위협에 대응하며, 마음의 평화를 위한 실패 없는 보호장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마케팅 용어일 뿐이며, 그 뒤에는 모호하고 경쟁적이며 검증되지 않은 기술적 제안들만 존재한다.
EU 국방위원회 위원이자 최근 드론 월 사업을 장악하려 한 안드리우스 쿠빌류스(Andrius Kubilius)는 5월에(비록 민주적 명령권도 없이) 대전략 질문에 대한 답을 친절히 제공했다. 그는 “간단히 말해 Pax Europaea: 올 것은 — 역량을 갖춘 유럽의 부상; 물질적·정치적으로 약화된 러시아; 철수를 준비하는 미국; 방위를 위해 유럽과의 긴급 통합을 준비하는 우크라이나. 유럽을 다시 독립시키자!”고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러시아의 배신성은 우크라이나 너머로 유럽을 침공하려는 계획이 아니라 EU의 유라시아 주도권 주장에 굴복하지 않는 데 있다.
유라시아는 러시아로 끝나지 않는다. 메르츠의 노골적인 ‘더러운 일(dirty work)’ 발언과 대중국 적대 정책들의 연쇄는 유럽의 유라시아 대륙 패권이라는 그러한 대전략이 덤으로 이란과 중국까지도 포함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는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발언—그것이 2029년처럼 먼 얘기든, 최근 프랑스의 경고처럼 바로 오늘 저녁일지라도—에 새로운 시각을 던진다. 이러한 발언들은 스파이 활동으로 밝혀진 러시아의 공격 계획보다는 서방 쪽의 의도에 더 기초한다: 적어도 향후 2~3년은 러시아에 대한 대리전의 지속, 발트 3국에 독일군 주둔, 대규모 재무장, 칼리닌그라드에 대한 나토의 선제 기습전 준비 자랑 등이 모두 전쟁이 필연적이라는 평가에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유럽 지도자들은 점점 더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메르츠, 도널드 투스크, 마크롱 모두 최근 우리는 이미—어느 정도는—전쟁 중이라고 말했다. 싱크탱크들의 논리는, 돈과 인구에서의 유럽의 ‘압도적’ 잠재적 우위를 적절한 결단력으로 군사력으로 전환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그러나 유럽의 신호전주의를 비판하고 이러한 급박한 군비 경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유럽의 여론 주도자들에 의해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동원된 대중과 극단적으로 온라인화된 공중으로부터 조롱과 공격을 받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 그들은 억지력(deterrence)을 발견했고 전쟁과 평화에 관한 최종 답으로 선언했다. 이는 불균형한 관점인데, 마치 국제관계 입문 강의의 2부를 건너뛰어 ‘억지력 기반 전략’의 필연적 결과인 안보 딜레마를 배우지 못한 것과 같다. 로마인들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거짓을 살고 있었다. W. E. B. 뒤 부와Du Bois는 옳았다: “전쟁의 원인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번 가을의 드론 침입들—실제로 일어난 것들과,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지만 많은 과장을 낳은 것들—은 억지력이 어떻게 우리를 안보 딜레마에 빠뜨리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다. 긴장의 다이얼 위에서 우리는 상대와 얽혀 있다. 우리가 한 클릭 돌릴 때마다 상대도 한 클릭 돌린다. 수년간 다이얼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러시아와 유럽은 상호 고조의 소용돌이에 깊이 갇혔다. 러시아 드론과 항공기가 유럽 영공을 침범하는 일은 경고이며, 수개월 동안 유럽 지도자들이 종전이 이뤄지자마자 ‘재확인 병력force’을 우크라이나에 배치하겠다고 빈말한 뒤에 울리는 현저히 큰 클릭 소리다.
전쟁의 북소리가 커질수록 이성적 토론은 묻혀 버린다. 만연한 군국주의 조건 하에서는 정치의 자연 법칙이 중지되고, 명백한 불합리를 지적하는 자는 처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비율의 GDP를 임의로 정해—수년간 2퍼센트였다가, 어제는 여전히 3.5퍼센트였고, 이제는 이미 5퍼센트다—모호하게 정의된 방위 필요에 지출하자고 하는 개념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가… 글쎄, 정확히 무엇을 위해? 우리가 평화와 안보 속에서 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결국 유라시아 패권이라는 새로운 대전략을 밀어붙이기 위해서인가? 민주적 거버넌스와 정치의 어느 다른 분야에서도, 어느 다른 부서에서도 장관이 공중에서 숫자를 끌어내어 그로써 토론의 시작과 끝을 선언할 수는 없다.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은 확실히 존재한다. 유럽은 수천억 유로—아마 최대 3조 유로에 달할 수도 있는—극도로 비싼 소위 ‘골드플레이트’ 무기체계에 지출할 계획이다. 아담 투즈가 말하듯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공재 낭비”다: 독일이 2030년까지 주문한 123대의 전차는 한때 작동하던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 탓에 손수 정성 들여 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전차는 제작비가 최대 2,900만 유로에 달할 수 있으며, 전장에 도달한 지 몇 분 만에 허접한 드론에 의해 파괴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OSINT 채널을 통해 그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해 왔다.
다극적 강대국 경쟁의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는 이 새로운, 파괴적인 비용-편익 계산의 대상이다. 5월에 미국은 호우티(후티) 반군과의 전투에서 고가의 항공기와 함정을 싸구려 드론과 로켓을 발사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와의 싸움에 낭비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체결했다. 몇 주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보안서비스의 드론 작전으로 그 전략 폭격기 기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 그 작전은 저비용으로도 극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럽인들이 무장해제하고 억지력에만 의존하라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군국주의의 불합리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고와 토론, 조직화와 노력이 필요하며, 인내하고 규율 있는 외교를 통해 고조를 멈추고 평화를 찾아야 한다. 백인우익적 제국주의로 향하는 미국의 후광을 빌린 대리적 패권이든, 유라시아에서 패권을 쥐려는 군국주의적 유럽이든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우리 유럽인들은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지,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할지에 대해 더 나은 답을 찾아야 한다.
글: 알무트 로초반스키(Almut Rochowanski)
출처: 자코뱅




